두려움을 느껴본 이들 사이의 연대감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꺼내볼까 해요. 어느 주말 오후였습니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남성이 대뜸 말을 걸었어요. “몇 살이에요?” “왜 그러시죠?” “몇 살인지만 말씀해주시면 안돼요?” “…….” “아까 건물에서 나오셨을 때부터 따라왔는데, 연락처 좀 알려주시면 안돼요?” 남성의 태도는 무례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더이상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뜨려는데, 갑자기 남성이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남성은 키 180cm이 넘는 거구였고, 저는 벽에 몰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저 진짜 용기낸 거라고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불쾌함보다 앞선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제가 읽고 썼던 수많은 여성 폭력 기사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일단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저는 최대한 남성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사과'를 하며 거절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죄송해요. 연락처를 드리는 건 곤란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한참 더 실랑이를 하고서야 남자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사히 지하철에 탄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저 사람을 볼 일은 없을테니까요.
이후엔 저처럼 운이 좋지 못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취재원, 거래처 직원, 직장 동료, 전남자친구의 폭력적이고 지속적인 연락에 괴로워하는 여성들이 주변에 많았거든요. 이들은 스토킹범의 연락을 '차단'하고 싶어하면서도, 해코지를 당할까 끊임없이 두려워했습니다. 상대방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통제하고 싶어하고, 상대방이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분노와 공격성을 보이는 것은 스토킹 범죄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만남 요구를 거부했다며 집 근처에 찾아오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살 협박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자를 비방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고요.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두려움을 느껴 본 여성들이라면 공적 시스템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아가씨가 어리고 인기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수사기관을 찾는 여성들은 경찰의 무관심과 2차 가해에 두번 세번 좌절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를 법정에 세운다 해도, 법원에서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10% 남짓에 불과합니다. 스토킹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피해자로서는 자신의 시간과 비용과 미래 안전을 모두 담보로 맡겨야 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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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강하고 용감했다
신당역 사건 피해자는 2019년부터 350통이 넘는 가해자의 연락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래도 피해자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이상의 피해는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형사 고소를 결심했고, 경찰 수사관과 적극적으로 소통했으며, 피고인 중심의 재판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합의를 종용하는 가해자의 집요한 연락에도 굴하지 않고 엄벌 탄원서도 제출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는지, 비슷한 두려움을 느껴본 여성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가, 합의 없이 오늘까지 버틴 것은 판사님께서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작성한 탄원서 중)
'엄중한 처벌’을 기대하며 버텨온 피해자는 끝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가해자 재판 선고를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사건 전날까지 피해자를 대리해 온 민고은 변호사는 “피해자분께서는 누구보다 강하고 용감한 분이었다"면서도 "수사기관, 법원 모두 피해자 보호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변호사로서 큰 한계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사법 시스템의 무능이 만든 비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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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피해자가 여가부의 1366 상담이나 주거, 법률지원 등 자기 자신을 얼마나 보호할 지 충분히 상담을 받았다면 조치가 강화됐을 것이고 이렇게까지 비극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20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해 논란이 됐습니다. 하지만 여가부가 스토킹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해 배정한 예산은 단 7억, 그것도 올해 처음 생긴 항목입니다. 여가부 예산의 0.046% 수준이죠. 설령 여가부의 피해자 보호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해도,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며 백래시에 앞장서 온 부처의 장관이 할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신당역 사건 이후에도, 죽었거나 죽을 뻔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들려오는 중입니다. 이제 국가와 사회가 할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를 골자로 한 스토킹처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나섰고, 검·경은 고위험 스토킹범에 대한 유치·구속수사 방침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성들의 죽음을 막겠다는 다짐이 '말'로만 그치지 않도록, 플랫팀도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저번 레터에서는 노원구 김태현 살인사건을 언급하며 피해자가 김태현의 ‘전 여자친구’였다고 표현했습니다. 피해자와 김태현은 연인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부정확할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 2차가해가 될 수 있는 부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피해자분과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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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디지털 성범죄자’ 형량 깎은 사법부의 ‘넓은 아량’
경향신문 사건팀 <n번방, 남겨진 공범들> 두번째 회차에서는 n번방 이후에도 계속되는 '사법부의 문제적 판결’에 대해 다뤘습니다. 취재팀이 디지털성범죄 판결문 275건을 입수해 양형을 분석한 결과 실형 선고는 20건(7.3%)에 불과했습니다. 100명 중 93명은 재판에서 집행유예(61.5%)나 벌금형(29.1%)으로 풀려나는 것이죠. 그렇게 풀려난 가해자 중에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조주빈 '박사방' 홍보에 가담한 남성도 있었습니다. 시험에 낙방해서, 군대 입영을 앞두고 있어서… 더욱 황당한 것은 법원이 가해자에게 선처한 ‘이유’입니다. “사법부는 내편”이라는 가해자들의 큰소리가 빈말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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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집으로 데려오는 여자들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때 언니들 되게 바빴을 텐데 어떻게 시간 냈을까.” 이슬아 작가의 칼럼제목을 보자마자, 이 글이 위로가 될 것이라는걸 알았어요. 30대에 접어든 이슬아 작가는 주위 여자들에게 '사는 거 너무 힘들면 우리집에 오라던 언니'가 되었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법 체계 아래에서도 친구가 죽지 않게끔 순찰을 돌고 초대하고 먹이고 재우며 힘을 보탠" 여성들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작가는 "돌봄과 살림만을 위해 24시간 대기 중인 언니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내가 원하는 건 언니들을 닮은 사회"라고 강조합니다. 여자들이 죽고 다치는 뉴스에 지쳐있었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마음이 힘든 이들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언니들을 닮은 글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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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 안써 체포된 자매의 죽음, 이란 뒤덮은 여성들의 분노
이란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시끄럽습니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됐던 마흐사 아미니(22)의 죽음이 발단인데요. 아미니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공유되면서, 경찰의 가혹행위 의혹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착용이 의무화됐고, 특히 최근 10년 사이에는 여성과 반대세력에 대한 통제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가디언은 젊은 여성의 죽음으로 이처럼 광범위한 저항이 일어난 건 2009년 이후 처음이라고 전했습니다. 자유를 되찾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왜 늘 '피의 역사'가 되어야만 할까요. 김서영 기자의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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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기 쉬운 젠더 뉴스를 '세줄 요약' 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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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교통공사의 대처가 연일 논란입니다. 여성 직원의 당직 근무를 줄이는 성차별적 대책을 내놓은데 이어 사내 분향소에 피해자 실명을 노출하기도 했죠. 사건 발생 직후 직원들에게 ‘재발방지를 위한 아이디어’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도 논란이 됐습니다.
- 🤔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두고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그런 것'이라고 발언한 이상훈 서울시의원이 '당원 자격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발언 이후 3일이 지나서야 대변인 명의 서면 브리핑을 통해 '엄중 문책'을 지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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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t's Comment!
반응 뜨거웠습니다. 5일간 1000여개가 넘는 메시지가 올라왔어요. 피해자와 비슷한 공포를 느껴본 여성들의 슬픔이, 누군가 죽어야만 논의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가,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결의가 추모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플랫은 이 목소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9월22일자 경향신문 9면에 추모글 일부를 발췌해 기록했습니다. 추모글 전체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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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모이는 곳. 플랫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질 때까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주변이 아닌 중심에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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